아마도 내가 실험 혹은 노이즈 음악에 대한 많지 않은 관심을 가지게 된 시작점 중에 릴레이 연주회가 있었고 그 연주회에서 자주 혹은 늘 볼 수 있었던 홍철기라는 뮤지션이 존재하고 있다. 많은 이야기들은 서툰 질문에서 나왔을 수도 있고 고민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더 음악이 스스로 말하겠금 하여야 하지만 작은 기회를 통해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말은 없을 수록 좋을 때가 있다.

text by hidros3 | photo by 노희주
ourtown 친구에게 홍철기씨가 초기 플래밍 립스의 앨범을 군대가면서 옛날 시티비트에 팔았고 그걸 자기가 샀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2000년에 나온 비트라는 잡지에서는 마크 코즐렉을 홍철기씨가 인터뷰 했었다. 예전에는 어떤 음악들을 좋아했었는가?
그 당시에 시티비트에 중고로 씨디를 많이 내놨던 것 같은데, 어떤 앨범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예전에는 어떤 음악들을 좋아했었다’고 말할 만큼 음악을 듣는 취향이 단순하게 달라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적극적으로 듣는 것이 아닌, 내 의도와 상관없이 들리는 음악은 더 이상 듣지 않게 된다. 이 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어딜 가든 들리게 되는 음악을 듣는 것은 결국 TV나 거리의 전광판에서 광고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마크 코즐렉과의 인터뷰 아닌 인터뷰 덕분에 ‘내가 누군가를 인터뷰할 능력이 못 되는구나’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ourtown 홍철기씨가 턴테이블을 연주하기 때문에 자신의 연주에 있어서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을 물어본다면 누구나 쉽게 오토모 요시히데를 떠올릴 것이다.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인가?
우선 턴테이블로 노이즈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싶다. 기타리스트 하면 지미 헨드릭스를 떠올리는 것이 극도로 부당한 것처럼 턴테이블 노이즈 메이커하면 바로 오토모 요시히데를 떠올리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오토모 요시히데는 진심으로 존경하는 노이즈 뮤지션 중 한 사람이며 그로부터 노이즈와 즉흥연주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내가 턴테이블을 활용하게 된 이유는 음악 외적인 관심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공기의 떨림이 아니라) 물체의 떨림을 이용해서 피드백을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보니 진동스피커에 대해 알게 되었고, 마이크나 기타의 픽업 대신에 고체의 진동을 입력 받을 수 있는 효율적인 도구가 턴테이블의 바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계기로 턴테이블 노이즈 연주를 시작하게 되었다. 레코드에는 정말 별 관심이 없었고 그냥 바늘과 떨림이 필요했다. 원래는 연주도 연주지만 설치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생각했던 것이고, 한 친구와 공동으로 이런 생각을 적용한 “Tectonic Membranophonics”라는 설치 작품을 만들어서 2007년 초에 Urban Sensorium이라는 전시에 출품한 적이 있다.
ourtown 이리카페에서 릴레이가 열리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 공간에 존재한다. 누구는 그곳에 오는, 혹은 와있는, 관객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홍철기씨는 그곳에 온, 와있는, 관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글쎄, 관객을 믿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관객들이 ‘비판적인 귀’를 갖도록 스스로 노력하기를 바랄 뿐이다. 예전에 평론가들은 귀는 없이 이론만 갖고 비판만 하는 통에 협력해서 일하기가 힘들었다. 음악을 새로 찾아 듣거나 발굴하는 것 없이 이미 알려진 것들에 이렇게 저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일만 주로 했다는 것이다(지금에 와서도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평론가’의 직함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다). 그 사람들이 비판적이라면 단지 그들의 입이 비판적일 뿐이다. 그런데 내 편견인지는 모르겠는데 지금의 관객들(혹은 감상자들)에게는 여러 가지로 경로로 상당히 많은 음악을 접할 수 있게 된 반면에 생각보다 비판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혹은 그러한 비판적 발언이나 피드백을 접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관객과 창작자가 최소한 같은 종류의 고민과 딜레마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는 사고와 발언이야말로 바로 ‘비판적’이라고 할 수 있다.
ourtown 이옥경의 “나의 살던 고향”은 자신의 어린 시절 그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기억은 희미해지는기 때문에 멜로디를 해체하고 분해하여 꼭 꼭 숨겨놓았다고 한다. 레나토 포지올리는 아방가르드를 이해하는 것은 그 예술가의 당위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홍철기씨가 턴테이블 노이즈로 말하고 싶은 바는 무엇인가? 하이테크놀로지 시대 억압 받는 노이즈의 해방인가? 홍철기씨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당신의 어떤 생각을 이해해주길 바라는가?
노이즈는 억압받고 있지 않다. 정말 세상은 시끄럽지 않은가? 문제는 단순히 노이즈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노이즈에 대한 통제와 생산의 권리를 우리가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노이즈에 대한 통제와 생산의 권리를 갖지 못할 때, 역설적으로 길거리에서 엄청난 음량의 유행가가 공격적이고 소모적인 노이즈로 우리의 귀에 들리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권리는 단지 귀를 찢는 노이즈 음악의 형태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환경에서 소음을 줄이려는 노력도 어떻게 보면 이런 권리의 일부를 이룬다. 하지만 이러한 침묵에 대한 권리는 단지 우리가 소음이 없는 시골과 같은 이상적인 음향적 환경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노이즈와 침묵 모두와 우리의 삶이 긍정적인 관계를 수립해야만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내 음악에 관해서라면, 내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어떤 생각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다. 어떤 음악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스피커와 자신의 고막(과 고막으로 전달되는 진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길 바랄 뿐이다.
ourtown Puredigitalsilence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아직도 홍철기씨의 음악에는 그 때의 감수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1번 질문과 다시 관련되는 내용일 수 있는데, 음악은 감수성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 그 사이에 가장 큰 변화일 것 같다. 우리의 감정 자체가 별로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음악의 방향이 많이 달라졌다. 감정이란 우리가 느끼는 주관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처럼 매우 객관적인 어떤 것이다. 물론 누군가에게 내가 맞으면 아프다고 느끼겠지만, 그 아프다는 느낌은 감정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런 느낌은 어떤 감정 표현의 결과다. 말하자면 노이즈 음악은 스피커를 통해 듣는 사람의 고막과 뇌를, 그리고 강한 저음을 통해 몸 전체를 때린다고 할 때 노이즈 음악은 어떤 감정을 발사하는 것이다. 예가 적절했는지 모르겠으나, 감수성의 문제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여전히 음악은 감정을 다룰 수 있다고 본다. 솔직히 말해서 PDS를 예전과는 다른 형태로 다시 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PDS의 예전 음악을 다시 듣지는 않는다. 감정보다는 감수성의 영역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거부감이 드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감수성의 영역을 완전히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초기부터 인디씬에 있어서 감수성이 강한 동력인 동시에 함정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해 왔고, 그래서 결국 감수성으로 음악을 접근하는 것에 대해 반성을 하면서 그런 태도에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음악적으로는 스스로 확장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면에서 현실에서의 입지는 더 줄어든 것 같다.
ourtown 프리/임프로브, 익스페리멘탈/노이즈씬을 보았을 때 재즈씬의 연주자들과 인디씬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융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데 내부자의 입장으로서 어떻게 느끼는가?
사실 재즈씬과 인디씬 모두와 거리를 느낀다. 재즈씬은 워낙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큰 불편함은 없다. 주위에 몇몇 사람들을 통해서 가끔씩 좋은 재즈 음반들을 접하고 있기는 하지만 큰 관심을 쏟아 본적은 없다. 인디씬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데, 나야 최준용과 별로 환영 받지 않은 음악만 만들다가 말았으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90년대 중후반의 홍대 인디씬이 등장하고 성숙하기도 전에 (일단) 몰락하는 것을 옆에서 살짝 지켜본 사람으로서 모종의 연결고리를 찾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러나 쉽지는 않다. 모 밴드의 멤버들과 6인조의 거대 노이즈 락 프로젝트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결과물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음악과 소리를 대하는 관점의 분명한 차이를 확인했다. 무엇보다 두 관점 사이를 넘나드는 것이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시도해 볼만한 일이라고 본다.
ourtown 당신의 음악은 사운드 아트라고 생각하는가, 노이즈 뮤직이라고 생각하는가? 노이즈 뮤직이라고 했을 때 음악이 겔러리와 같은 미술 공간에서 소비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운드 아트로 불리우는 것이 싫다하면 익스페리멘탈 뮤직을 갤러리와 같은 미술 공간에서 더 듣기 쉬운 상황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것은 일정 정도는 상황의 문제다. 클럽에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므로.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 쪽에서도 기존의 홍대 클럽 시스템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주로 클럽은 음악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에 너무 밴드와 DJ에게 간편하게 포맷이 짜여 있다(무대나 음향기기 등). 밴드나 DJ 이외의 다른 편성이나 방법으로 연주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는 아예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갤러리가 속 편하다. 이런 상황의 문제 이외에도, 미술계가 (최악의 경우에는 피상적인 관심이 동기가 되어서일 때도 있지만) 다양한 분야에 손길을 뻗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영화만큼이나 현재의 미술은 고전적인 미술의 영역을 벗어나서 확장을 꾀하고 있다. 최소한 이러한 확장이 유행인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가 갤러리에서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그러나 나도 이러한 상황에 전체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느낀다. 오히려 사정이 되는 한에서 양자 모두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된 영역과 공간을 확보하고 싶다. 물론 네트워킹의 측면에서는, 즉 어느 정도 관심사와 목표, 정치적 성향이 공유된다는 전제 하에서는 클럽이든 갤러리든 결코 거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여전히 독자적인 영역과 공간의 확보는 단지 나에게뿐만 아니라 내 예술 동료들, 그리고 앞으로 합류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미술계든 인디씬이든 여전히 창작자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ourtown 당신의 최근 작인 with cartridge without cartridge에서 카트리지 없이 노이즈를 만들었는데 이러한 접근은 개인적으로 턴테이블에서 혁명적이라고 생각한다. 카트리지 없이 만들어진 음악은 더욱 더 광포한데 현제 카트리지 없이 만들어진 노이즈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 그러한 시도는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이미 많은 턴테이블 노이즈 연주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2005년 봄에 Otomo Yoshihide가 I.S.O.로 서울에서 공연했을 때 전화카드 등을 턴테이블의 플래터에 마찰 시켜서 미세한 소리의 연주를 했던 것을 본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연주 방법을 acoustic turntable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주로 피드백을 연주방법으로 사용하다가 이런 방법이 꽤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름 몇 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시도하다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내가 원하는 보다 과격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보다 많은 실험과 개선의 여지가 있는 연주방법이다. 즉흥연주자로서는 당분간은 이 방향을 탐구할 계획이다.
ourtown 현재 당신의 음악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인가?
10여 년간 같이 작업을 해 온 최준용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Through the Sloe부터 지금의 노이즈 즉흥음악에 이르기까지.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외에는, 지금까지의 음악활동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밴드 음악의 형식을 포기하는데 있어서 일말의 양심의 거리낌을 없애준 Merzbow와 Sonic Boom을 꼽고 싶다. 나중에야 밴드 이외에 여러 가지 편성과 방식으로도 더욱더 공격적이고 시끄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처음 음악을 할 때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딱 저 둘이었다. 요즘에는 음악보다는 같이 작업을 하는 김곡이나 이행준 같은 실험영화감독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ourtown 사람들의 취향은 어떻게 결정된다고 생각하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취향이 어떻게 결정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자신의 취향에 대한 일종의 자기결정권을 갖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이 자기결정권은 단지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당신은 상관 말라’라고 하는데 그쳐서는 안 되는 것 같다. 결국 취향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그리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다.
ourtown 최근 가장 좋아하는 음반 3장만 뽑아달라.
Axel Dörner – Sind
Swans – Body to Body, Job to Job
Pain Jerk/Incapacitants – Live at No Fun Fest 2007
ourtown 공중캠프에서 불길한 저음 공연하는 것을 보았다. 최준용씨와 박승준씨가 테이블을 던지고 놀 때 뒤에서 묵묵히 턴테이블을 연주하였는데 어떠한 생각이 들었나? 같이 뛰어들고 싶진 않았는가? 홍철기씨는 공연때 마다 중심을 잡고 있는 느낌이 든다.
우선 장비보호 차원이다. 워낙 액션을 안 해도 장비를 험하게 쓰는 편이라서 액션 때문에 장비에 부가적인 손상을 입히는 일이라도 최소한 방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불길한 저음에서 연주할 때는 사실 연주보다는 다른 멤버들이 연주하는 노이즈를 들으면서 모니터링을 하거나 그 소리들을 즐기는데 더 만족하고 있다. 아직은 그렇다.
ourtown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는가?
내 자신은 지금 음악이나 예술을 하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이후에 참여하게 될 사람들을 위한 터를 닦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독자적인 대학문화라는 상당한 지지대이자 토대를 지니고 있는 미국이나 호주 등과 우리나라는 결코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 단순히 결과물만 놓고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산자의 입장에서도 적극적으로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만큼 수용자의 입장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만 이런 씬의 최소한의 재생산이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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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약한 이메일 인터뷰에 응해주신 홍철기씨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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